고구려 주몽의 부족연맹체제
신화에 의하면 주몽은 남하할때 3명의 부여인과 동행하였으며 엄시수를 건넌 뒤에도 다시 재사 등의 3명을 만나 수하로 거느리게 되었다. 설화속의 개인은 종종 집단을 상징하므로, 부여로 부터의 남하집단이 비교적 큰 규모였으며, 남하하는 과정에서 또 다시 여러 부족을 병합한 사실에 대한 상징적 표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실제로 고구려는 건국 초기부터 주변지역을 빈번히 공격해 많은 성과를 거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중 가장 큰 성과는 동명성왕 재위 2년에 비류국을 병합한 것인데, 비류국은 당시 그 일대에 분포한 여러 소국들을 이끌던 주도세력이었던 것이다,
때문에 고구려는 비류국을 병합함으로써 신흥 중심세력으로 부상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묘사한 듯한 기록이 중국측의 역사서에서 다소 짧고 건조하게 실려있는데, 즉 "삼국지" '동이전'에 따르면 고구려에는 연노부, 절노부, 순노부, 관노부, 계루부 등 5개의 부족이 있어서 그중 연노부 사람들이 왕위에 올랐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연노부가 점점 힘이 미약해지더니 지금은 계루부가 대신 왕위에 오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왕의 종족으로서 대가인 사람들만 고추가라는 칭호를 가질 수 있었는데 유독 연노부의 적통대인 만큼은 고추가라는 칭호를 얻을 뿐만 아니라 종묘와 영성사직에 제사 지낼 수도 있었다고 합니다.
연노부가 '후한서'에는 소노부로 나오는데 한편 왕은 대대로 절노부의 여자와 혼인했다고 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절노부를 왕비족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위 내용의 중국측 기록을 보게도면 혹시 비류국이 연노부에 해당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지만 특히 비류국의 왕으로서 주몽에게 항복한 송양의 이름이 소노부의 소노와 유사하다는 점이 지적되기도 합니다.
고구려에서는 물가 혹은 계곡 등에 해당핳는 지역을 나.노.내 라든지 양.양.양으로 표현했다는 사실이 참고가 됩니다.
그런데 고구려의 5부가 "삼국사기"에는 연나부. 환나부. 관나부. 비류부. 등의 명칭으로 나와 혼란을 주고 있습니다.
어느쪽이 원래 명칭인지는 정확히 확인이 되지 않으나, 연나부는 절나부. 환나부는 순노부. 관나부는 관노부. 비류부는 소노부를 각각 달리 표현한 것으로 보입니다.
"한원". "통전". 등 중국측 사서에 의하면, 계루부는 나중에 내부 또는 황부로 칭해졌으며, 절노부는 북부. 흑부. 후부. 순노부는 동부. 청부. 상부. 좌부. 관노부는 남부. 적부. 전부. 소노부는 서부. 백부. 하부. 우부 등으로도 불렸습니다.
그중 왕을 배출한 계루부의 명칭은 국호에까지 영향을 주었는지 모릅니다.
고구려라는 국호가 초기에는 중국측에 구려로 표기된 적도 있는데, 이것이 성을 뜻하는 고구려어 구루에서 왔다면, 계루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