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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깨비시장/역사속 인물

정명공주(화정)의 생애, 광해군의 이복동생

by show쇼 2017. 9.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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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공주(화정)의 생애, 광해군의 이복동생



정치 투쟁의 비열함을 온몸으로 느꼈으며, 죽음에서도 살아 돌아왔으며, 이복 오빠은 광해군의 탁원한 외교 정책을 펴고 대동법을 시행한 정말 어질고 현명한 임금이었을까?

아니면 어머니인 인목대비를 폐하고 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사리에 어둡고 어리석은 임금이었을까??

어지러운 17세기의 조선을 정명공주(화정)를 통해 다시한번 바라봐 보겠습니다.



'화정'은 어느 한쪽으로만 보려는 기존의 편견을 버리고 당시의 역사를 있는 그대로 보고 있습니다.

광해군이란 프리즘 만으로 역사를 볼때 우리는 시각의 사각지대에 빠질 수 있습니다


정명공주의 화정은 이런 사각지대를 광해군의 이복 동생의 입장에서 다시한번 바라볼 수 있게 해줍니다.

정명공주는 선조 때에서 숙종 때까지 83세까지 장수한 것으로 임진왜란 직후에 태어나 조선의 전체 역사중 1/5을 경험할 수 있었는데요, 정치 투쟁의 비열함을 온몸으로 느끼면 살았다고 합니다.






사람은 어떻게든 갈등의 관계에 놓이게 되는데 오해와 편견의 덩어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사 자체가 갈등인 것이죠

'화정'은 이런 갈등을 정치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공생 코드인 '관용, 친절, 배려' 과련된 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정명공주가 서궁 유폐 시절에 남긴 책으로 '화정'은 조선의 역사를 비추어 보는 거울인 것이죠..

화정에서 화(華)는 꽃 또는 빛을 의미하고, 정(政)은 다스림을 의미 합니다.






때문에 화정은 화려한 정치 또는 빛나는 다스림으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화려한 정치에 는 일신의 영달을 추구하는 모습이 담겨 있으며, 빛나는 다스림에는 자기 수양과 애민의 의미가 녹아 있는 것이죠

이것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정치 기술의 키워드인 화정으로 당시의 조선 정치사를 풀어낼 수 있었습니다






정명공주는 냉엄한 정치 세계에서 살아남으로고 스스로를 빛나게 다스리는 기을 선택하였는데요 이책을 보면 반목과 갈등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공생할 수 있는 지혜를 얻을 수 있을 겁니다.

1603년 6월~1685년 9월까지는 조선후기의 왕족으로 선조와 인목황후의 따리면 영창대군의 누나

광해군 때 폐서인이 되어 어머니와 함께 감금되는 고초를 겪었지만 인조반정 이후 공주로 복권이 되고 중추부동지사 홍영의 아들 홍주원과 혼인을 하게 됩니다. 사도세자의 비 혜경궁 홍씨, 홍봉한, 홍인한, 홍국영, 원빈 홍씨 등은 모두 그의 후손들 입니다.


1603년 6월 27일 선조와 인목왕후 김씨의 사이에서 선조의 21번째 자녀이자 10번째 딸로 태어났으며

선조는 52세의 늦은 나이에 얻은 늦둥이 딸 정명공주를 괴장히 이뻐 하였으나 이목 오빠 광해군이 즉위한 다음 외할아버지 김제남과 동생 영창대군은 계축옥사에 연루되어 역모죄로 처형이 됩니다.


이후 어머니 인목황후가 서궁에 유폐되면서 정명공주도 함께 감금이되고, 인목왕후를 평손하는 절목에 정명공주와 관련하여


"공주의 늠료와 혼인한 옹주의 예에 따른"고 규정하였으며

당시 정명공주의 폐서인 여부를 놓고 류간이 대비를 후궁으로 대우한다면 그 딸인 공주도 옹주로 강등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였지만


이이첨이 그 말을 듣지 않고 공주를 폐서인하되 오로지 늠료와 혼인만 옹주의 예에 따르도록 하였습니다.

이미 아들을 잃은 인목왕후는 딸마저 잃을까봐 두려워 광해군이 정명공주의 일을 물으면 즉었다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1622년 인조반정이 일어나나 정명공주는 공주로 다시금 복권되고 어머니와 함께 창덕국으로 거처를 옮기데 됩니다.

당시 정명공주의 나이는 21세로 이미 혼기가 한참 지난 나이였기 때문에 조정에서는 공주의 혼인을 서둘렸으나 공주의 나이가 너무 많아 남편감의 나이 제한을 약화한 끝에 동지중추부사 홍영의 아들인 홍주원을 남편감으로 선택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런 과정에서 인목왕후는 사위 홍주원에게 왕만이 탈수 있는 말인 어승마를 타고 궁에 들어오라고 하여 조정에 문제를 일으켰지만 인조는 반정의 명분 때문에 인목왕후를 벌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인조는 인경궁의 재목과 기와를 내어주어 정명공주의 신혼집을 짓게 하였으며 정철을 내어주는 등의 크게 후대하였다고 합니다.


원래(경국대전)에서는 공주의 집은 50간을 넘지 못하게 규정하고 있었지만 정명공주의 집은 200간에 이르렀으며, 경상도에만 8,076결에 이르는 넓은 땅을 하사 받는 등의 엄청난 호사를 누렸었습니다.






이때 정명공주에게 내려진 사유지가 바로 일제시대까지 소작쟁의가 일어나는 악명 높은 암태도 입니다.

정명공주는 선조와 인목왕후를 닮아 선이 굵고 힘이 넘치는 한석봉체를 잘 썻는데 조선 후기의 서예가 남구만은 자신의 저서에서 정명공주의 글씨를 칭찬하기도 하였습니다.


인목왕후 또한 산석봉체를 잘 써 생전의 선조를 기쁘게 하였는데 정명공주 역시 서궁에 유폐되어 있을 당시 아버지 선조를 닮은 글씨를 쓰며 어머니를 위로하였으나 30대와 40대 때에는 붓글씨를 끊었고 한문도 쓰지 않았다고 합니다.


인조의 의심을 살 것이 두려워 바느질과 가사에만 전념 하면서 의도적으로 정치를 외면하였던 것이죠


인목왕후가 죽은 후 궁중에서 발견된 무도한 백서로 인해 인조와 효종의 의심을 산적도 있지만 인조반정의 공신인 장유, 최명길등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ㅇ며, 인조와 효종이 죽고 나자, 현종, 숙종 2대동안 정명공주는 종친의 최고 어른으로서의 대접을 받았습니다. 남편 홍주원과의 사이에 7남 1녀를 두었으며, 1685년 9월8일 83세의 나이로 사망 하였는데 이것은 조선시대 공주들 중에서도 가장 장수한 기록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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